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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과 일본인이 같이 도시 문제 해결에 함께 나서다?Urban/Original 2023. 9. 7. 17:15
# 한강연안 주민들은 한강을 식수로 이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경성부에서 이촌동에 거대한 분뇨탱크를 설치하고 밤중에 한강에 분뇨를 무단 배출하여 한강물을 심각하게 오염시켰다. 분뇨로 한강물을 식수로 사용할 수 없게 되자 한강연안 주민들은 경성부를 상대로 수도부설을 청구했다.
# 지식인촌이었던 성북동은 교육열이 두드러져서 야학∙유치원∙삼산학교∙영명학교 등 여러 개의 지역 학교를 설립하거나 재건하여 주민들의 기금과 봉사활동으로 운영하고 있다. 이는 마을 주민들이 직접 자금을 모아 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거나 재정난에 빠진 지역 학교를 살려내는 사례이다.
서울과 같은 현대 도시에서 벌어지는 도시문제는 이미 일제강점기 서울이었던 ‘경성’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 주택부족, 도로개설, 오물처리 등이 1910년대에서 1930년대 사이 경성에서 벌어지는 주요한 도시문제였다. 도시문제 해결을 위해 조선인과 일본인이 함께 문제해결을 위해 민원이나 진정을 넣기도 했고, 문제 해결을 위한 주민운동단체를 만들어 직접 도시문제 해결을 위해 나서기도 했다.
급증하기 시작한 경성인구 “주택난 해결해 달라”
직접 집짓기 시작한 조선인⋯건축왕 정세권의 탄생
도시 문제란 도시화로 인구가 집중되면서 나타나는 다양한 현상들을 말하는데 주거∙교통∙환경∙쓰레기 문제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경성에도 도시문제가 나타난 이유는 산업화로 인한 인구집중문제 때문이다. 1920년 경성 인구는 25만 명이었는데 1930년 39만 4340명이 되었고, 1940년엔 93만 5464명으로 늘어났다.
192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한 인구 증가로 인해 제반 도시 시설들은 수요를 감당하지 못하는 문제가 벌어지게 되어 주택난이 벌어졌다. 당시 경성에는 일본인 거주 인구도 많이 늘어나 경성 전체 인구의 26%를 차지할 정도였다. 그들은 주로 청계천을 기점으로 남쪽이나 용산구 후암동, 중구 예장동 일대에 거주를 했다. 일본인 거주자가 많이 살던 이곳은 ‘남촌’이라 불렀다.
일본인 남촌 인구가 점점 늘어나자 조선인이 많이 살던 청계천 위쪽 지역으로 주거지역을 확장하기위해 총독부는 정부기관을 국공유지에 먼저 입지시켜 일본인을 진출시키기 시작했다.
이에 조선인의 영역을 지키고자 우리나라 최초 디벨로퍼라 불리우는 정세권을 비롯한 김종량, 이민구 등은 민간 주택 건설 사업을 시작한다. 이들은 1920년 9월 9일 부동산개발회사인 ‘건양사’를 설립해 조선인을 위한 집을 짓기 시작했다. 건양사는 전통한옥 구조를 ‘ㅁ’자 안에 집약하고, 부엌과 화장실을 신식으로 개선하여 개량한 도시한옥을 만들었다. 이 같은 형태의 한옥이 줄지어 만들어진 가회동 31번지 일대가 지금 ‘북촌 한옥마을’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인 유지들은 1921년 주택구제회를 결성해 무주택자를 위한 주택 건설에 나서기도 했고, 경성부청에선 주택난 해결을 위해 부영주택 건설계획을 발표했다.
공동묘지∙화장장∙분뇨탱크 등 혐오시설 이전 요구
이보다 더한 건 서울과 교외지역에 대한 차별
일제강점기 경성의 도시문제는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도 발생하고 있는 도시문제인 혐오시설 이전, 기반시설 설치, 대중교통 노선 연장, 유흥시설 퇴출, 재해 방지 시설 설치, 과도한 임대료 인상 항의 등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도시문제 해결을 위해 주민들은 뭉쳐서 주민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당시 도시문제가 벌어진 양상을 보면 ‘경성지역에서 주민운동의 가장 보편적인 단위는 동∙리였다는 점, 도시문제 발생 지역은 대부분 1936년에 경성부로 편입된 교외 지역이었고 이 당시에 지역주민운동이 활성화 됐다는 점, 상당수 지역에서 조선인과 일본인이 연대 했다는 점 등이다.
도시문제가 가장 많이 발생한 지역을 살펴보면 경성부 교외 지역이었다. 당시 경성부는 지금의 종로구, 중구, 용산구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 외 강북지역은 고양군에 속했고, 강남지역은 시흥군, 김포군, 광주군 등에 속해있었다. 경성부 교외 지역이라 했을 때는 지금의 서대문구, 동대문구, 마포구, 성북구, 강북구 등이 여기에 해당되었는데 1925년에서 1935년 사이 경성지역 사회적 인구증가가 이곳 인접지역에서 초래됐다. 경성부 인접지역들은 1936년이 되어서야 경성부로 편입되지만 주민 상당수가 경성부로 출근하는 노동자들이었기 때문에 출퇴근 관련 도로교통 문제가 중요한 사안이었다.
또한 도시문제를 두고 조선인과 일본인은 지역의 이해를 중심으로 연대한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이 같은 사실은 이촌동 제방축조 운동, 전차구간제 철폐운동, 교외선 철폐 반대투쟁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도시문제에 대해서는 일제강점시기에도 공동의 지역 이익을 위해 행동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총독부∙경성부의 미온적 대응으로 도시문제 만성화
살기 좋은 동네 만들기 위해 시작된 성북의 지역주민운동
도시문제 해결을 위한 민원 창구는 총독부와 경성부였다. 도시문제 해결을 위해 민원이나 진정을 제기하기도 하고 지역에선 동이나 리 중심으로 지역주민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도시문제 해결이나 도시기반시설을 지어야 하는 경성부는 새로운 도시계획 수립과 시행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렇지만 경성부의 도시계획은 도시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한 1920년보다도 16년이 지난 1936년에서야 발표된다. 이 계획 마저도 도시문제 해결이 아닌 ‘국가에 의한 효율적 토지이용’에 있었다. 그나마 계획된 것도 전시체제의 장기화로 인한 예산과 물자부족으로 거의 중단되다시피 했다. 결국 이런 대응은 경성의 도시문제를 만성적인 사회문제로 만들었다.
지역에서 벌어지는 도시문제 해결을 위해 일부 지역에선 지역주민운동을 펼쳤다. ‘일제시기 도시문제와 지역주민운동-성북지역 성북동의 사례를 중심으로’에선 지역에 만들어진 주민운동을 조명했다. 성북동에는 청년회 조직인 ‘성북구락부’와 ‘성북정회’가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만들어졌다.
성북구락부는 마을상여와 소방구 구입, 마을 주변의 풍기단속 등을 했다. 또한 성북소년회를 설립하고 돈이 없어서 학교를 가지 못한 학령초과 아동들의 교육시설인 야학원을 운영했다. 성북정회의 경우 지금으로 치면 유흥주점이나 다름 없는 ‘요정’을 추방하기 위한 운동을 펼치는가 하면, 수도부설 진정운동이나 버스 운전시간 연장을 위한 진정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2007년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학술지에 제출한 ‘일제시기 도시문제와 지역주민운동-성북지역 성북동의 사례를 중심으로’를 쓴 김영미 국민대 연구교수는 “성북동 사례는 주민운동이라는 사건들은 물밑에 존재했던 지역사회의 일상적 정치행위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것”이라며 “주민들의 생활공간이었던 동은 새로운 인구의 유입으로 전통적인 공동체성을 상실하고 있었지만 이 단위로 주민들을 결집시키는 새로운 환경들이 조성되고 있었던 것”이라 설명했다.
*참고 자료
-일제시기 도시문제와 지역주민운동-경성지역 성북동의 사례를 중심으로
-1930-40년대 경성시가지계획의 전개와 성격
정민구 에디터
journalseou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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